입대하여 신병교육을 마치고 나면 자대 배치가 된다. 자대에선 신병 바로 위 고참이 갓 전입한 병사에 대한 교육 및 군기를 담당한다. 일종의 멘토링이다. 자대 생활에선 바로 위 고참이 누구냐에 따라 군생활의 방향이 결정된다. 내가 자대 배치를 받았을 때 바로 위 고참은 휴가 나가서 여자친구 이를 부러뜨린 것을 자랑삼아 얘기하는 폭력적이고 싸이코 같은 인물이었다. 그 고참과는 제대할 때 까지 악연으로 이어졌다.

병무민원상담소로 발령을 받은 지 벌써 9개월째다. 늘 민원인들에게 최고의 정성을 쏟았다고 생각하지만 솔직히 뒤돌아보면 항상 뭔가가 부족했고 또 반성할 것도 많았던게 사실이다. 그것은 결국 조금씩 타성에 젖고 나태해져 가는 내 모습의 증거이기도 했다. 그런 차에 이번에 멘토로 지정이 되어 신규직원에 대한 멘토링을 담당하게 되었다.  별로 아는 것도 없고 또 능력도 부족하지만 이제 막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후배에게 악연으로 나를 기억되게 하지는 말자는 다짐과 함께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멘티로 지정된 후배 직원은 약 한달반에 걸쳐 병무행정에 대한 기본 지식을 익힌 상태였기 때문에 바로 내 전화상담 내용을 옆에서 들어보는 것에서부터 멘토링을 시작하였다. 솔직히 나 혼자 상담을 할 때는 잘 몰랐는데 누군가 도청하듯 옆에서 듣고 있다고 생각하니 조금 떨리기도 했다.

그렇게 며칠이 흐른 뒤 후배 혼자서 전화를 받도록 했다. 처음엔 조금 걱정하는 듯 하더니 생각보다 무난하게 전화상담이 이뤄지는 걸 보니 참 적응이 빠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니터링을 해보니 목소리도 낭랑하고 대전 사람 특유의 사투리도 거의 쓰지 않았으며 발음 또한 비교적 정확해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말에 진정성이 담겨있지 않은 점은 좀 아쉬웠다.

나는 전화 상담의 기본을 진정성에 둔다. 민원인이 단순히 입영날짜 하나만을 물어보고 전화를 끊더라도 상담원의 말에서 진정성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소신이다. 업무지식과 전화 화법이 형식이라면 진정성은 내용이라 할 수 있다. 형식이 아무리 잘 갖추어져 있더라도 상담원의 말속에 진심이 들어있지 않다면 민원인은 반 밖에 만족할 수가 없는 것이다.

진정성이 담긴 상담이란 내가 철저하게 상대방의 입장이 되는 것이다. 카드회사 상담 직원들은 업무 지식도 많고 고객 대응 태도도 매우 훌륭하다. 하지만 그들에겐 카드사용금액 연체자들이 카드사들로부터  결제 독촉을 당하면서 느끼는 고통이나 절망에 대한 연민이 조금도 담겨 있지 않다. 그래서 그들에게선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사실 이번 멘토링의 주안점은 진정성을 갖춘 상담 능력을 키우자는  것이었다. 그것을 위해 수없이 많은 상담 내용들을 다시 들어보며 어떻게 하면 조금더 민원인의 입장에서 상담을 할 수 있을까를 끊임없이  고민해야만 했다.

이렇듯 진정성이 중요하긴 하지만 물론 형식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나를 모순에 빠지게 하기도 한다. 언젠가 한번은 목소리가 정말 예쁜 여자에게서 입영기일 연기를 문의하는 전화가 걸려왔다. 많은 전화를 받아봤지만 정말 그렇게 듣기 좋은 여자 목소리는 드물었던 같다. 괜히 대화 시간을 좀더 끌어보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하는, 조금 과장하면 흔히 말하는 천상의 목소리...

“저.... 군대 연기좀 할려고 하는데요”
“무슨일 때문에 그러십니까? 연기는 병무청에서 규정해 놓은 사유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저... 집안일 때문에 그런데요”

얘기가 자꾸 길어져 처음에 의도한대로 대화 시간을 늘리는 것 까지는 좋았는데 그러다가는 상담이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어떻게든 결론을 내야겠다 싶어

“동생분 지금 옆에 있습니까? 아무래도 동생분과 바로 얘기를 해야 빠를것 같습니다”
“예.....? 제가 본인인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