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 빨간 색으로 집어 삼킬 듯이 불타던 여름이 은은한 시선으로 옆에서 조곤고곤 내 말을 들어주는 친구 같은 가을에 드디어 바톤을 넘겼습니다.
아직까지 낮에는 곡식을 익힌다고 제법 햇살이 뜨겁지만 아침 저녁으로는 손 끝에서 살랑거리는 바람을 느끼자면 조만간 그 곳으로 떠날 채비를 챙겨야 할 것 같은 풍경이 떠오릅니다.
갈바람으로 일렁거리는 억새바다가 떠오르는 것이지요.

일단 억새가 어떤 식물인지 알아볼까요?
억새와 갈대는 흔히 혼동되기 쉬운 식물이지만 억새가 산이나 비탈에 자라는 반면, 갈대는 물가에 무리를 이뤄 사는 점이 다른 점입니다.
억새의 뿌리는 굵고 옆으로 퍼지면서 열매가 익게 되면 반쯤 고개를 숙이지만 갈대는 뿌리옆에 수염같은 잔뿌리가 많고 열매가 벼처럼 고개를 푹 숙이지요.
억새꽃은 그 생김이 백발과 비슷해 쓸쓸한 정서로 해지는 황혼에 가장 잘 어울리는 식물 중 하나라고 하겠습니다. 억새꽃을 가장 잘 감상하려면 해질 무렵 지는 해를 마주보면서 반사되는 억새의 모습을 보는 게 가장 아름답답니다.

부산 근교에서 억새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려면 전통적으로 이름난 곳이 영남알프스의 사자평 고원입니다. 영남 알프스는 ‘영남의 지붕’ ‘영남의 병풍’이라 불리는 백두에서 뻗어 내려온 태백산맥의 줄기이며, 가지산, 간월산 등 영남의 대표적인 8개 봉우리를 안고 있어 수려한 산세가 유럽의 알프스를 닮았다 하여 영남의 알프스로 불리고 있으며, 이 산들 중 하나인 재약산에 있는 사자평 고원은 한반도 최대의 억새군락지로 손꼽히는 곳으로서 150여만평의 넓이를 자랑하지요. 사자평은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승병을 일으켜 훈련시켰던 곳이자 여순사건때에는 빨치산의 집결지로도 이름이 나있답니다.

사자평 고원은 광평추파(廣坪秋波)라 불리는 은빛물결로 가을이면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데, 10월 초순보다는 10월 말이 억새가 가장 아름답습니다.
사자평 억새의 특성은 커봐야 가슴 높이밖에 안 올 정도로 키가 작고, 잎새가 가늘고 소박하여 바람에 흐르는 듯한 우아한 모습은 보기 힘들지만 이 짧은 키의 억새 때문에 눈 아래로 펼쳐진 억새바다의 장관을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사자평으로 오르는 방법은 표충사에서 곧바로 이어지는 길과 쌍폭포를 지나 옛날 고사리 마을로 들어가는 길이 있습니다. 산행의 재미를 맛보기엔 표충사 일주문 앞에서 다리를 건너면서 계곡일을 따라 올라가는 길이 좋은데 산행길이 아름답고 걷기에도 어렵지 않습니다.
완만하고 시원한 계곡길을 따라 30여분 걷다 보면 홍룡폭포가 산행자들을 맞이하게 됩니다. 시원한 폭포 밑에서 잠시 쉬다가 30여분을 또 걸으면 모양부터 층층인 층층 폭포를 만나게 됩니다. 20m 높이의 폭포 2개가 연달아 떨어지는 층층 폭포에서 스트레스를 한방 날리고 30여분을 더 걸으면 고원에 드디어 닿게 됩니다.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실 고사리 마을은 약초와 산채가 많고 고사리가 많아 마을 이름이 되었으며 한 때 주민들이 80여가구나 살았지만 산 아래 일거리를 찾아 마을 주민들이 떠나고 고사리 분교가 폐교하는 등 주민들이 모두 철거한 상태랍니다.
사자평 고원에 이르면 옆을 걷던 사람들의 모습도 억새에 숨기어 그저 내 옆을 걷는 동료들의 모습만 보일 때도 있지요. 그러다 이구석 저구석을 살피다 보면 사람들의 모습이 두런두런 보이기도 한답니다.
등산한다고 흘린 땀이 어느정도 식을 무렵 언덕배기 쪽을 올라가서 밑의 억새를 감상하다 보면 은색의 부드러운 파도에 마음을 뺏길지도 모릅니다. 해가 뉘엿뉘엿 저멀리서 남은 쓸쓸한 빛을 비추어주면 더 그럴지도 모르지요.
예전엔 그 고원에 막걸리 파는 부부가 있었는데 지금은 다른 분이 막걸리를 파실는지 한번 휘익 둘러보아도 좋겠습니다.
그래서 그 텁텁하고도 시원한 막걸리와 은색 파도를 가슴에 담아 내년 이만쯤 올해 가을의 어느 때를 추억할 수 있게 되어도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