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무청에서는 연초부터 “봉사”라는 테마가 화제였다.
내년부터 사회복무제도를 시행하는 기관으로서 직원들부터 봉사정신을 함양하고 직접 체험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연초에 봉사활동을 의무적으로 가야한다는 소리를 듣고 강요에 의한 봉사는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반발심부터 생겼다. 절대로 제도에 순응하지 않으리라는 비장한 오기가 충천하기도 했다.
그런 불편한 마음으로 봉사활동을 간 곳이 바로 「인천 사할린 동포 복지회관」 이었다.
나에게 있어 “사할린”이라고 하면, 대하소설 「아리랑」 의 한 귀퉁이에서 살을 에는 듯한 추위와 황량함으로 묘사되었던 러시아 땅이라는 것 외에는 아는 것이 없었다.
사할린 동포에 대한 별다른 사전지식 없이 그저 봉사활동을 가보면 저절로 알게 되겠지 하는 안이한 생각으로 복지관을 찾았다.
봉사활동을 위해 평소 기상시간보다 일찍 일어나서 부산을 떤 탓에 복지관에 도착하기 전부터 약간 지친데다, 낯선 복지관 건물 앞에 무료한 듯이 앉아있는 백발의 어르신들을 보고는 왠지 힘든 하루가 될 듯한 예감이 들었다.
복지관에서 김주자 관장님으로부터 사할린 동포가 생겨난 역사적 배경에 대한 말씀을 들었다.

일제 2차대전 말 사할린의 부족한 노동력 확보를 위해 모집이라는 미명하에 강제 징용된 한인들이 종전 후 소련의 억류정책에 의해 귀국하지 못하고 오늘날 사할린 동포가 되었다.
단지 국가가 무력했던 “그때”를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시대의 상처를 고스란히 짊어져야 하는 그들의 고통이 가슴에 사무쳤다. 현재 한국에 영주 귀국할 수 있는 자격은 사할린 동포 1세대에게만 주어지는 것으로, 자식들을 사할린에 두고 오신 분들이다. 한평생 사할린의 추위만큼 모진 세월을 겪고 따뜻한 고국으로 돌아오셨지만, 사할린에 있는 자식 생각에 마음은 아직도 추위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의 봉사활동은 청소 등 육체노동이 아니라, 어르신들의 허전함을 메워드리고 가슴을 따뜻하게 해 드리는 말동무가 되어드리는 것이었다.

나는 2층에 계신 몸이 불편하신 할머니의 파트너로 지정되었다.
점심을 먹기 전에 10분 정도 시간을 내어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러 갔다. 할머니는 늘 앓던 천식에 감기까지 걸려서 몹시 힘들어하셔서 그냥 가만히 옆에 있어드리기로 했다.
오후에는 자선 공연 행사가 있어 실제로 할머니와 이야기 할 시간은 1시간 밖에 없었다. 할머니의 손을 모아잡고 이런 저런 질문을 드려 봤지만 피로하신 탓인지 대답이 없는 때가 더 많았다.
그러던 차에 마침 공연이 시작되어 할머니를 모시고 행사장으로 갔다. 자선 행사 내내 할머니의 어깨와 팔을 주물러 드렸다.
팔이 점점 아파왔지만, 마음은 점차 편해지고 좋아졌다. 참으로 오랜만에 가슴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단순한 일로 행복을 느낄 수 있다니 이런 것이 봉사의 매력인가 보다.
마지막 인사를 할 때, 할머니는 다음달에 셋째 아들이 찾아온다면서 아픈 와중에도 힘을 내어 웃어 보인다.
오늘 내가 할머니의 마음 언저리에 쌓여있는 사할린의 시린 눈을 얼마나 녹여 드렸는지 모르겠지만, 봉사활동을 다녀온 후 “봉사”에 대한 나의 부정적인 생각은 사라졌다. 역시 체험은 생각을 변화시키기 위한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수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