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살의 나이로 입단 대회를 통과, 세계 최연소 입단이라는 신기록을 세우며 프로바둑의 세계에 입문하고, 63년 일본 바둑계의 거장 세고에 겐사쿠(瀨越憲作) 9단 문하로 일본 유학을 떠나기까지 바둑 없는 내 인생은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물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런 나에게 바둑알 대신 총을 잡으라는 국가의 부름은 참으로 암담한 것이었다. 1970년 일본 기원이 발행하는 바둑 잡지 <기도>가 해마다 활약이 뛰어난 기사를 대상으로 시상하는 기도상 신인상을 수상하는 등 그동안 키워 온 재능을 꽃피워 볼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이런 마음은 나 뿐 아니라 스승님을 비롯해 나를 아껴주시던 주위 분들도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여러분들께서 비록 비공식적인 경로이긴 하지만 일본 정계를 통해 내가 유학 생활을 계속할 수 있게 해달라는 요청을 우리 정부에 해주시기도 했다.
하지만 원칙은 분명했고 한치의 예외도 있을 수 없었다. 결국 일본 기원 5단의 경력으로 스무 살의 나이에 군 입대를 위해 귀국했다. 유학 생활 10년 만이었다. 귀국을 결심하기까지는 적지 않은 방황과 갈등을 했지만 대한민국 남자로서 반드시 거쳐야 할 군 생활이라면 보다 적극적으로 임하고 싶어 공군으로 자원 입대하게 됐다.
그러나 1973년 8월 입대한 첫날부터 나의 군 생활은 좌충우돌의 연속이었다. 가장 어려웠던 점은 언어 문제. 한창 언어적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를 일본에서 보낸 터라 한국말에 능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일상적인 회화는 가능했지만 군대 용어란 것이 생활 용어와는 거리가 먼 터라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처음엔 좌향좌 우향우 소리도 알아듣지 못해, 남들은 모두 왼쪽으로 가는데 나만 오른쪽으로 가는 우수꽝스러운 장면도 여러 번 연출해야 했다.
프로기사 조훈현이라는 나의 타이틀은 군 생활에 장애물인 동시에 버팀목이 됐다. 지휘관이나 선임병들 중 내 이력을 아시는 분들께선 말이 서툴러 실수를 할 때마다 이해해주셨고, 오히려 격려를 해주시기도 했다. 하지만 “네가 그렇게 유명한 인간이냐”라며 못마땅하게 여기는 선임병들도 적지 않았다. 특히나 바둑을 좋아하는 지휘관들이 부르는 바람에 열외되는 일이 더러 생겨 그런 분위기를 부채질했다. 덕분에 얼차려를 받는 일도 적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