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나는 무엇보다도 절제된 대사와 멋 부리지 않은 정직한 화면처리에 점수를 주고 싶다. 이들이 없었다면 결코 내가 그토록 감탄한 역동적이면서도 깔끔한 속도감은 보기 힘들었을 것이고, 따라서 감동과 재미 역시 반감되었으리라는 생각이다.
예를 들어 “다음엔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라는 대사 뒤에 감정을 고조시킨다고 뭔가를 더 붙였다면 이 촌스러운 신파조의 대사는 결코 힘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훈련대장이 고위공직자를 만나 “중앙정보부가 국가냐?”며 대들던 장면도 마찬가지다. 그 한 마디에 훈련대장의 진심(어쩌면 국민의 진심일지도 모를)이 다 담겨있고, 붉으락푸르락 몸을 떨면서 “권력자가 의지를 갖고 결정을 내리면 그것이 곧 국가의 명령이다.”라던 공직자의 말 역시, 공포정치를 조장하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자의 뒷모습을 너무나 적나라하게, 그러나 명쾌하게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유쾌해지기까지 한다. 만약 그가 냉정하거나 차분하게 말했다면 그런 기분까지는 느끼지 못했으리라. 화를 낸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무의식에 있는 불안감을 나타낸 것이 되기도 하고, 단순 맹목적인 난폭성을 드러낸 것이기도 하니까.

  그리고 탈취한 버스에서 뉴스를 듣고 “무장공비는 너무 한 거 아냐?”라고 한 훈련병의 한 마디도 잊기 힘들다. 세상에, 할말이 얼마나 많을 그들일텐데 “무장공비는 너무 한 것 아냐?” 한 마디라니. 하지만 깊은 절망감이 배어있는, 귀보다는 마음으로 들어야 하는 이와 같은 대사는 격분한 수만 마디보다 더 큰
 

울림으로 권력자의 가증스러운 위선을 드러나게 한다.
이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 전편을 통하여 관통하는 일관된 절제미는 마침내 끝 장면에 가서는 기막힌 압축미로 진가를 발휘한다. 녹슨 캐비넷 하나, 그 복잡한 의미를 한 마디의 대사도 없이 소품 하나로 마무리하는 이 장면은 정말 압권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는 잃어버린 조각이 많은, 거대한 그림 조각을 맞추는 장난이라고 불려왔다”는 영국의 정치학자 E. H. Carr의 말이 소름끼치게 떠올려지는 장면이다.

이제 정직한 화면에 대해 말 할 차례이다. 다큐멘터리적이어서 촌스럽다고 하거나, 영화적 멋이 없어서 잘 찍은 영화가 아니라고 하는 평가도 있는데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수필을 보면 그 주제나 소재, 또는 지적으로 쓰고 싶은가 정적으로 쓰고 싶은 가에 따라 문체가 달라질 때 글의 맛이 제대로 살아난다. 산(山)의 남성성에 대해 쓰고 싶다면 우유체보다는 강건체가 더 효과적이듯, 어떤 수필은 지극히 간결하고 소박해서 오래도록 사랑 받는 작품들이 있다.
상식은 서로 통하는 것이니까 영상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영화적 멋을 내야 하는 영화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영화도 있을 것이다. 영화적 원칙이나 기법을 안다고 해서 그것을 모든 영화에 적용시키려고 하는 것은 아마추어가 하는 일이고, 원칙을 바탕으로 하되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그것에 맞는 것을 찾아 작품을 만드는 운용의 미까지 갖추는 것이 프로의 세계라고 생각한다. 만일 영화적 수준을 높인다고 겉치장 많은 화면을 만들었다면 중ㆍ장년층까지 영화 앞으로 불러 앉힌 ‘국민영화' 같은 영광은 쉽지 않았으리라는 것이 내 나름대로의 소견이다.

이렇게 칭찬을 해온 나이지만 결점이 없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다만 전편을 통해 질주하는 강력한 에너지가 몇몇 결점들을 그대로 뛰어넘었다는 생각이다.

한국 영화사를 새롭게 쓴 <실미도>.
영화인이 아니더라도 이렇게 발전해 가는 우리 영화를 보는 것은 참 즐거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