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로를 지난다. 나에게는 20킬로니 아직 부담이 없다. 제 페이스를 잃지 않고 꾸준히 달려온 것이 대견하다. 102보충대 앞에는 갓 들어온 수백 명의 신병들이 도열하여 응원을 하고 있다. ‘아빠 힘내세요.’ 울먹이는 소리가 들린다. 나도 늙었구나. 그네들 보기에는 내가 엊그제 헤어진 자기 아빠처럼 보이는 가보다. 정말 이 지점부터는 뛰기가 힘들다. 혼자 달린다면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을 것이다. 고독도 이 때는 무리에게 양보한다. 다리가 쇠처럼 굳어져 가는 느낌이다. 내 다리가 쇠다리가 되어버린 건 아닐까. 굽혀지지 않는 다리를 달래가며 나는 쉬엄쉬엄 달린다.

높은 아치형 모양의 소양2교를 지나자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린다. 시가지에 진입한 것이다. 그러나 종착지점까지는 아직도 7킬로나 남아있다. 광안리 바닷가에서 매일아침 뛰던 거리이다. 이런 땐 환상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래 지금 나는 광안리 바닷가에서 아침운동을 하고 있는 거다.‘고통이 000000올 때마다 결승점을 통과하는 자랑스러운 모습을 상상하라. 때로 고통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많은 사람들이 나를 환호하며 지켜 본다고 생각해 보라. 벅차 오르는 감격과 함께 희열을 느끼면서 달려라 .
킬로를 지날 때, 어떤 아주머니가 파스를 발라준다.‘복 많이 받으세요.’ 말이 나오니 아직 내 입은 건재하다는 증거겠지. 또 다른 나를 바라보며 잠시 웃음을 흘렸다.
드디어 춘천종합운동장으로 들어왔다. 뒤따르던 마라토너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앞질러간다. 저 사람들은 무슨 힘이 남아 갑자기 저렇게 속도를 내어 달릴까?
칩을 반납하고 나서야 내 기록을 확인해봤다. 4시간 35분. 완주한 것이 우선 뿌듯하다. 연초에 공개적으로 선언한 여름 하프, 가을 풀을 이룩해 낸 것이다. 그러나 이루지 못한 것도 있다. 보스톤 마라톤 출전자격은 따내지 못했다. 3시간 30분이내의 기록을 보유한 사람만이 출전이 가능하다고 하니, 나는 자격요건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실망하지 않는다. 나는 또다른 나를 찾아 떠나는 고통의 여정을 즐기고 사랑할 줄 아는 진정한 마라토너가 되기를 바랄 뿐이기 때문이다.

병무청에서 이번에 출전한 15명이 차례로 다 들어왔다. ‘야, 타!’ 버스는 운행하지 않는가보다. 어두워질 때까지 계속 들어오는 마라토너들, 사실 그들이 오늘 춘천마라톤의 주인공들이다. 나는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