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여류작가 시오노 나나미가 지은 ‘로마인 이야기’를 보면 로마가 대제국으로 발전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잘 묘사돼 있다.
용병제를 취한 카르타고와 달리 로마군은 시민병과 동맹국군으로 구성돼 있었다. 시민병은 노예나 돈 없는 사람이 아니라 상류층 등 중산층 이상의 시민들이 주축이었다. 핵심 편제인 ‘군단’ 편성이 끝나면 총사령관인 집정관과 장병들은 신전으로 갔다. 자유를 누리는 시민으로서 자신이 속해 있는 국가와 가족을 지키기 위해 병역의무를 성실히 수행할 것을 신에게 맹세하기 위해서였다.
시오노 나나미는 기원전 225년쯤 로마와 동맹국의 병역 대상자수와 실제 병력수를 비교해 볼 때 로마시민은 동맹국 주민에 비해 3배나 많은 병역을 치렀다고 분석했다. 병역의무를 신성시하며 충실히 이행했던 로마시민들의 자세가 거대한 로마제국을 만든 원동력이 됐다는 얘기다.
그러나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200만에 가까운 대군(大軍)이 대치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병역의무에 대한 시각은 로마의 그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듯하다.
현역으로 군에 다녀온 사람은 ‘어둠의 자식들’로, 군 면제를 받은 사람은 ‘신의 아들’로 불리는가 하면, 98년 이후 3년여 동안 계속된 병역비리 수사결과는 90년대 들어서도 병역비리가 적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최근엔 일부 대선후보 아들의 병역면제과정에 비리의혹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 이른 바 ‘병풍(兵風)’이 온 나라를 뒤흔들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 병역문제와 관련해 무엇보다 세간에 큰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은 이른바 ‘양심적 병역거부’문제다. 양심적 병역거부는 징병제를 채택해 일반적인 병역의무가 인정되고 있는 국가에서 자기의 종교적 신앙이나 도덕률, 철학적 이유나 정치적 이유 등에 따른 양심상의 결정을 근거로 병역의무 이행을 거부하는 행위를 말한다.

지난 해말 ‘여호와의 증인’신도가 국가인권위에 진정서를 제출하면서 불거진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는 일부 시민·법률단체와 대학교수들이 이를 지지하고 나서면서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
특히 지난 9월말 이화여대 총학생회가 양심적 병역거부 지지를 선언하면서 사이버상에서도 격렬한 찬반논쟁이 일었다. 필자가 운용중인 군사전문 사이트(www.bemil.pe.kr)에서도 군복무를 마친 남성들이 이화여대 총학생회의 결정을 비난하는 글들이 쇄도하기도 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군가산점 폐지에 이어 양심적 병역거부까지 인정한다면 누가 군대에 가려 하겠는가”, “내가 군에서 보낸 3년을 누가 보상해 줄 것인가”라며 격한 반응을 보였다.

양심적 병역거부는 기독교적 평화주의를 존중하는 종교적 전통에서 비롯, 거부자의 대부분은 종교적 이유 때문에 발생하고 있으나 정치적, 이성적 동기에 의한 거부자도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외국 사례를 보면 독일의 경우 ‘양심상의 이유’로 인한 병역거부를 인정하고 있으나 정치적 이유로 인한 병역거부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 지난 95년엔 징집대상자 중 17만 9000여명이 현역으로 입대한 반면 16만 600여명이 공익봉사를 선택, 독일군 창설 이래 최대의 현역복무 회피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영국에서 1차 세계대전 이래 종교적 이유뿐 아니라 일부 정치적 동기에 의한 병역거부권도 인정돼 왔으며, 대만도 지난 2000년 병역법을 개정, 종교적 신념에 의한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해 대체복무를 인정하고 있다. 90년대 들어 냉전 종식 후 군사적 긴장이 감소함에 따라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하는 국가가 늘고 있는 추세다.

반면 우리나라와 비슷하게 군사적 긴장도가 높은 이스라엘은 양심적 병역거부를 비롯, 대체복무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앞으로 북한의 군사적 위협이 감소할수록 양심적 병역거부 인정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높아질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그러나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안보현실과 병역의무 이행에 대한 여론 등을 감안하면 우리나라에서의 양심적 병역거부 인정은 아직 시기상조라는 견해가 더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