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촉촉하게 스며드는 알싸하고 상큼한 영화의 향기에 좀더 젖어있고 싶었다. 잊혀질 것 같지 않은 언니 메메의 아름답고도 슬픈 눈망울. 엔딩 크레딧 끝까지 흐른 주제곡, 그 아름다운 노래에 마음이 잡혀 쉽게 일어날 수 없었다.
자매 사이에 일어나는 잘디잔 에피소드들, 그것을 마치 구슬꿰 듯 아롱지게 잘 엮어낸 영화 ‘작별’은, 스쳐 지나가는 사소한 일상, 하지만 어느새 우리 속에 들어와 큰 울림으로 남겨지는, 그래서 더욱더 그리움에 사무치게 하는 가족애 자매애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원제가 ‘El faro del sur(남쪽등대)’인 이 영화는 부모와 남동생을 교통사고로 잃고 살아가는 자매의 성장기이다. 댄서를 꿈꾸었던 아름다운 언니 메메는 17살에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다리를 절게 되고, 절망을 느끼기도 전에 동생의 인생도 책임져야하는 등대의 운명에 놓이게 된다. 동생 아네타는 겨우 8살, 단란했던 시절의 가족 앨범을 손에서 놓지 못한다. 추억을 되씹는 게 나이든 증거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죽음과 별리의 아픔을 겪은, 혹은 희망을 잃은 이들에겐 그 순간부터 행복했던 과거가 곧 절실한 추억이 되는 것을. 앨범을 보는 동생에게 부질없는 짓이라고 타박했던 메메도 사실은 행복했던 시절을 마주보는 게 두려울 뿐, 기억을 함께 한 존재는 결코 사라지는 것이 아님을 모를 리 없다. 앨범은 끝까지 두 사람을 하나로 이어주는 강력한 끈 역할을 한다.

비록 원한 삶은 아니지만, 메메는 얼굴 가득 발랄함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그녀의 인생은 엇나가기만 한다. 그녀의 말대로 한번 뒤틀려진 건 다시 되돌릴 수 없는 것일까. 잃어버린 가족의 행복을 보상받으려는 듯 이성에게 다가서지만 번번이 실패로 끝나고, 유부남인 앤디의 애도 유산되고 만다. 메메는 술과 담배로 자신을 학대한다. 밝음 뒤에 있는 허무의 안개가 그녀를 서서히 잠식해간다.

하지만 동생에 대한 사랑은 세상을 다 줄 만큼 크다. 이 영화의 재미는 바로 자매가 티격태격 아옹다옹 싸우고 사랑하는 에피소드에 있다. 자매만이 가질 수 있는 아기자기 상큼하게 빛나는 장치가 영화 전편에 걸쳐 펼쳐진다. ‘나’로 시작해서 ‘파’로 끝나는 말은 ‘나 배고파’식으로 상대방 마음 알아맞히기, 메메가 큰 고모 술병에 오줌을 넣었다는 것을 끝까지 물어보는 아네타의 짖꿎음, 속상한 일이 있을 때마다 수영도 못 하면서 물 속에 뛰어드는 메메의 대책없음, 상어야, 상어야로 시작되는 외설적인 노래를 천연덕스럽게 부르는 어린 아네타, 사팔뜨기를 보면 가슴 만지기… 등 재미있는 요소가 마치 씨줄날줄 오색줄로 엮은 고운 매듭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적당하게 꼬이고 엮이며 극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연결시키고 재미와 웃음을 선사한다. 관객들은 자기도 모르게 자매의 일상 속으로 빠져든다. 자매를, 영화를 사랑하게 만드는 참 맛있는 장치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