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 일어나 채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선생님 김밥까지 부탁하더니 퇴근길에 만난 아이는 더운 날씨 탓을 하며 포도밭에 못 갔노라고 했다. 하긴 아직 여름이다.
처음이라 낯선 ‘여름방학’ 앞에서 “여름방학은 바다와 모래성과 조개껍데기다”라는 엄마의 설명만 굳게 믿고 있다가, 예기치 못한 입원으로 여름방학을 고스란히 날려버리고, 제 심정을 표현할 길이 없어 딴에는 벙어리 냉가슴 앓듯 있었던 모양이다. 어느 날 병원을 찾은 아이가 “엄마, ‘실망’이란 말 알아요?” 했다. 저로서는 여름방학을 놓친 복잡한 느낌이 멋지게 형상화된 ‘실망’이란 단어를 발견하고는 기쁜 마음으로 엄마에게 전한 것이었겠지만, 좋지도 않은 ‘실망’의 첫 경험이 엄마한테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 못내 안타까웠다. 의미조차 제대로 알아채지 못한 첫 여름방학을, 조개껍데기로 꾸며진 모래성으로 추억하게 해 주고 싶었는데, 아픈 엄마 옆에서 자고 싶어 조르는 투정과 큰 노래소리를 나무라는 옆 환자의 꾸중으로 아이의 여름방학이 얼룩져 버릴 때, 발을 삔 나의 칠칠찮음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병가를 신청하여야 할 때에는, 아이의 여름방학은 제쳐 두고라도 나로 인하여 더 뜨거워진 여름을 나야 할 동료에 대한 미안함으로, 직장인으로서 1개월 여 동안 자리를 비웠다가 다시 복귀할 때는 어떨 지에 대한 걱정으로 참 막막하였다.

병역의무도 닥친 사람들에게는 나의지난 여름 같은 것일까? 군 복무기간은 인생에 포함되지 않는 시간이라고 여겨질만도 하고 그동안은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할 수 없다는 엄연한 사실에 안타까울만도 하고 전역후의 일에 대한 불안이 클만도 하다. ‘우리나라는 다른 강대국들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기에 손쉬운 대상일 뿐만 아니라, 동족간의 대치가 끝나지 않은 슬픈 현실을 지녔기 때문에 더더욱 스스로를 지킬 힘이 필요하다’는 우리가 처한 상황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그래서 고위공직자나 연예인이나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서넛 모이기만 하면 병역의무에 관한 논란으로 시끌법석해지고 그 논란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것일게다.
하지만 퇴원을 하고 다시 출근을 시작하면서는 여름 한가운데에서 느꼈던 안타까움과 막막함이 왜 그리도 절실했었나 싶은데 병역의무 역시 이 같은 것이 아닐까?
병원에서 보낸 지난 여름은 일 년 중의 겨우 한 철, 평생을 두고 보면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인 것처럼, 그리고 다친 엄마를 보살피면서 훌쩍 커버린 아이와 뜻하지 않은 사고를 위로해 주면서, 떠맡겨진 업무를 마다하지 않은 동료에 대한 감사와 신뢰라는 뜻밖의 선물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병역의무도 그 이행 후엔 인생의 깊은 속살로 들어 앉을 소중한 어떤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퇴원 후 한 가지 늘어난 일과가 있다. 그것은 여름방학숙제를 하는 것이다. 아이의 여름방학은 진작에 끝났고 숙제의 유효기간도 지났지만, 아이와 나는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는 것에 매료되어 매일 저녁 때늦은 여름방학 숙제에 매달린다.
오늘은 4절지 도화지에 “해바라기 이야기”를 주제로 그림을 그리고, 색종이로 접은 매미를 한 켠의 큰 나뭇가지 위에 얹어 놓았다. 해바라기의 꽃잎을 노란색으로 채우던 아이는 어떤 마음이었는지 모르겠다.
엄마된 나는 아이가 꽃잎 한 장 색칠할 때, 이 아이가 제 나라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짙은 초록색의 무성한 나뭇잎을 색칠할 때는, 이 아이가 제 나라의 현실을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그리고 색종이로 매미를 접는 작은 손을 바라보면서는, 이 아이가 언젠가 힘든 노동과 고된 일상에 부딪치더라도 긴 인생과 역사를 염두에 두고 처신할 수 있기를 기도했다.
포도밭 대신 유치원 옆 잔디밭에서 김밥을 먹었다더니 노느라 어지간히 피곤한 모양이다. 아이는 낮게 코까지 골며 자고 있다. 해가 진 지금은 제법 서늘하다. 오래지 않아 아이가 포도밭 구경을 갈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