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언니의 큰 보호막 덕으로 아네타는 10년 후 밝고 맑은 아가씨로 자라난다. 언니의 잔소리를 지겨워하고 그 그늘을 벗어나고 싶어하지만 순수하고 당돌한 성품은 그대로 간직한 채 심신이 건강한 처녀가 된다. 하지만 언니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와 있다. 그녀는 사고 이후 가장 아름다운 한 때를 보낸 천국같은 바닷가, 그 앞에 있던 등대 사진을 보며 세상을 떠난다. 동생에게 ‘작별’을 고한 것이다.
물론 큰사랑을 가진 언니는 마지막까지 그냥 떠나지 않는다. 아네타의 첫사랑을 사진으로 찍어 앨범으로 남기며, 유서처럼 쓴 편지에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너‘였다고 고백한다. 무엇보다도 ‘네’가 ‘내’인생의 등대였다고도 쓴 대목에서는 목이 알싸하게 아파온다. 언니는 어린 동생의 등대가 되기 위해 슬픔도 참고 명랑한 척하면서 살아왔지만, 이제 와 보니 그저 옆에 있어줘서 고마웠던 동생이 자신의 버팀목이며 등대였노라고. 알고 보면 서로가 서로에게 등대였던 셈이다. 그래서 원제가 ‘남쪽등대’이다.
이 영화의 소재나 줄거리는 일상적이고 평범하다. 큰 볼거리도, 현란한 액션, 극적인 사랑이나 미움도 없다. 아르헨티나와 우르과이를 돌며 찍은 풍광도 인물을 덮을 정도는 아니다. 오직 일상의 솔직함과 평범함이 온기 어린 숨결처럼 따스하게 숨을 쉬고 있을 뿐이다. 바로 이 보편성이 우리 모두의 이야기인 양 동화시키고 삶의 진실성을 뽑아올린다. 관객은 자매가 보여주는 일상의 빛을 따라 자신도 한번쯤 그랬을 것 같은 가족애를 체험해본다.

또 하나 이 영화의 빠뜨릴 수 없는 장점은 자칫하면 신파적일 수도 있는 내용을 깔끔하게 끌어간, 시종 밝은 표정을 잃지 않았던 메메 언니의 역할이다. 그녀는 유산이 되었을 때도, 다친 다리쪽의 골반이 부서지듯 아플때도 결코 절규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생은 내게 엄마도 갖지 못하게 하고 아기도 갖지 못하게 한다. 앞으로도 멋대로 하겠지…”라고 앤디에게 쓴 편지에서는 그녀의 내면에 퇴적암처럼 켜켜이 쌓인 아픔의 두께를 느끼게 한다. 담담한 듯 하지만 울림이 있는 이런 대사들은 관객의 감성을 은근하게 휘어잡는다.

점점 개별적이고 분화되어 가는 세상에서 가족만큼 뜨거운 관계도 없을 것이다. 평상시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처럼 소중함을 모르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가장 큰 그림자를 드리우는 사람들. 게다가 자매라는 사이는 얼마나 정겹고 친근한 사이인가. 가족이라는 그 끈끈한 공감대에 동성이라는 유대감, 모녀라는 수직관계가 아니라 수평으로 끈을 잇는 동지애로 얽히고 설켜 여성만의 특유한 감수성이 샘물처럼 솟아나는 사이. 때론 미워하고 경쟁도 하지만 한 이불 속에서 알콩달콩 나눈 정은 웬만해선 그들을 평생 친구로 남게 한다.
마치 한코 한코 정성스레 뜬 수예품이 듯 작은 일상 일상을 모아 큰사랑과 아픔 인생으로 짜내고 있는 ‘작별’, 영화는 가족앨범처럼 쉽게 잊혀지지 않을 따스한 기억을 남긴다. 언니는 갔지만 영원히 간 것은 아니다. 함께 한 추억이 아네타에게 남아 있는 한. 이제 홀로 남은 아네타는 늙은 기계공이 기계에 스치는 연장 소리에도 그리움을 느끼듯, 언니와의 소소하고 자질구레했던 일상들을 사무친 그리움, 영롱한 아픔으로 간직하게 될 것이다. 등대 앞에서 자매가 춤추던 마지막 장면부터 엔딩 크레딧 (영화 끝을 알리는 자막) 끝까지 울려 퍼지던 주제곡 <내가 기억하는 작은 것들>의 노랫말처럼

시간이 흐르면 / 잊혀질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 떠나간 기차는 다시 돌아오죠
그리움에 사무치게 하는 건 언제나, / 스쳐지나간 작은 기억들, / 함께 걷던 골목길
혹은 낡은 서랍 속 빛 바랜 종이 위에 남겨진 그 기억들은
도둑처럼 문 뒤에 숨어 있다가 살그머니 우리 곁에 다가와서는 /
바람이 낙엽을 이리저리 날리듯 우리의 마음을 휘저어 놓겠죠 /
그러다가 문득 / 그 기억들이 슬픈 미소지으며 우리를 바라보면 /
혼자 남은 우리는 눈물짓고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