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마라톤을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자신과의 사랑이라고 고집을 부린다. 뛰는 것 자체를 즐기고 고독을 노래하며 또 다른 나를 찾아가는 여행이기도 하다. 달리는 동안에는 온갖 생각이 다 튀어나온다. 그 중에도 꿈을 안겨주는 상념은 가슴을 따뜻하게 한다. 나는 요즘 ‘진주성, 그 용사일기’ 작품 구상에 빠져있다. 그 플로트가 생생히 떠오를 때는 날아갈 듯이 달린다.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된다. 기록을 위해 나를 혹사하지 않고, 나의 건강과 나의 의지를 즐기며 사랑한다.

‘남이 뛸 때 나도 뛰고 남이 쉴 때 나는 달린다.’ 마라톤의 영웅 자토벡이 한 말이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춘천호반에서는 그의 다른 말이 떠오른다. ‘새는 날고 물고기는 헤엄치고 사람은 달린다.’ 단순한 말이지만 삶에 대한 깊은 통찰과 철학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자토벡은 체코의 독재에 항거하여 평생을 박해받으며 살다가 10년 전 공산정권이 무너지고서야 영웅으로 복권되었다. 감당하기 힘든 고통과 온갖 유혹이 그를 괴롭혔지만 그는 굴하지 않았다. 그는 참으로 대단한 의지력을 가진 사나이였다.

노랑 풍선을 등에 맨 ‘4:40분 페이스메이커’가 앞질러 간다. 이러다가 5시간 페이스메이커가 쫓아오겠다. 달리는 동안에도 나는 간혹 꿈을 꾸곤 했다. ‘야! 타.’를 외치며 실어 나르는 마감 버스가 나타나는 것이었다. 포세이돈 어드벤처에서처럼 넘어진 배 바닥에서 죽음의 사신이 되어 덮쳐오는 파도를 연상하는 꿈이다.
25킬로를 지나면서 춘천댐을 향한 마지막 오르막이 이어진다. 보폭을 짧게 하며 팔을 낮추어 용진한다. 드디어 4:40분 페이스메이커를 앞질렀다. 안심이 된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내리막길에서는 또 앞지름을 당한다. 풍선이 둥둥 떠내려가듯이 까마득하다. 나는 왜 내리막에 왜 약한 걸까. 무릎 통증을 의식해 뛰지 못하는 이 설움을 누가 알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