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면서 생긴 나름의 직업병이 있다. 일명 할아버지 울렁증. 연세가 드신 할아버지만 보면 가슴이 쿵쾅쿵쾅.
그날도 어김없이 연세 지긋하신 할아버지 한 분이 민원실로 들어오시는데 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어서오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이에 할아버지는 병무청에 오시느라 많이 힘드셨는지 자리에 풀썩 앉으시면서 “6·25때 죽은 내 동생 병적증명서 한통 떼 줘”라고 하셨다.
‘아! 제발 병적확인이 잘되는 사람이어야 할텐데......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우선 신청서를 받아 병역사항을 확인해 보니 ‘역시나’ 안나온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또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하나 고민에 고민을 더하며 “할아버지! 지금 확인해 보니 6·25에 전사하신 분인 것 까지는 확인이 됩니다만, 자세한 병역사항은 확인이 되지 않아 지금 즉시 발급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할아버지께서는 지난 일을 회상하시듯 눈을 잠시 감았다가 이내 뜨시고는 “내 동생이 말이야 6·25때 군에 가서 전사했는데 이제 나도 나이가 들었고, 나 죽기 전에 내 동생 국립묘지에 안장시키려고 하는데 병적증명서를 떼 오라고 하네. 아가씨가 힘 좀 써줘 봐.” 또 내 가슴이 뛴다. 군에 다녀오신 할아버지들께서 흔히 하시는 말씀이 “확인 안되면 아가씨가 힘 좀 써줘 봐” 하시는데 이럴 땐 정말 내가 힘을 써서 된다면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해결해 드리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걸 어떻게 하겠는가?
그런데 병적증명서 발급사유가 국립묘지 안장이라고?! 순간적으로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앗! 이건 증명서 발급 없이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라며 쾌재를 부르며, “그럼 제가 한번 관계기관에 알아보겠습니다. 잠시 앉아서 기다려주세요.” 라고 말씀드리고 난 후, 육군본부에 전화를 해 할아버지의 사정을 설명하고 병적증명서가 꼭 필요한 것인지 문의를 했다. 육군본부 담당자는 몇 가지 확인해 보더니 할아버지의 동생이 이미 국립묘지에 안장되어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한편으론 의심스러운 생각도 들었지만 이번 건은 쉽게 해결되겠구나 생각을 하며 현충원에 확인을 하였더니 할아버지의 동생이 아닌 다른 고인이 안장되어 있다고 했다. 육군본부에 다시 전화를 걸어 현충원에서 확인한 내용을 설명했더니 담당자는 재확인하겠다며 서류를 제출해 달라고 하였다. 할아버지께 육군본부로 제출할 서류를 안내해 드리고 제출양식에 기재할 사항을 직접 써 드렸다. ‘바로 해결해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라고 할아버지께 말씀드렸더니 할아버지는 ‘아니여, 수고했구먼!’ 하시며 집으로 돌아가셨다. 나는 겉으론 내색하지 않았지만 ‘앗싸! 오늘은 힘들이지 않고 민원하나 해결!’ 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근무에 열중할 수 있었다.

일주일 후.
민원실로 들어서시는 낯익은 얼굴의 할아버지 한 분. 나의 가슴은 또 쿵쾅쿵쾅. 그런데 민원실로 들어오시는 할아버지의 얼굴은 환한 미소를 머금고 계셨다. 조금은 의아해하며 “안녕하세요!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인사를 드렸더니 할아버지는 말씀 대신에 문서 한 장을 쓱 내미신다.
확인해보니 할아버지 동생의 국립묘지안장을 허가한다는 문서였다. “덕분에 힘들이지 않고 일이 잘 처리됐어. 실은 내가 지금 많이 아파. 원래는 8년 전에 동생을 국립묘지로 옮기려고 신청을 다해놨었는데 내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고 계속 치료받고 하느라 지금껏 못하고 있다가(말씀을 멈추고 숨을 고르시고는) 인제 더 이상 미루면 안되겠다 싶어서 아픈 몸을 이끌고 지난 번에 병무청 왔던건데 잘 처리해줘서 국립묘지 안장허가도 쉽게 받었어. 다음달에 이장하라고 하네.
나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 정말 고마워. 이 얘기하러 왔어” 하시며 인사를 하셨다. 그 모습에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졌다. 조국을 위해 싸우시다가 돌아가신 많은 분들이 지켜온 이 땅에서 지금 이렇게 편히 근무하며 내가 한 일이라곤 자리에 앉아 전화 몇 번 한 것 밖에 없는데 그것이 그렇게 감사받을 일인가? 오히려 우리나라를 위해 힘든 역경 다 이겨내신 할아버지와 그 동생분과 같은 모든 어르신들께 내가 감사해야 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강하게 나를 질책했다.
지금껏 어르신들만 보면 가슴뛰어 했던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럽다.
호국보훈의 달, 유월이 곧 다가온다. 앞으로는 병무청을 찾는 모든 어르신들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즐겁게 맞을 것을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