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맘 때.
어떤 씁쓸함에 가슴을 쓸어내리던 기억...
언제쯤 이 낡고 두터운 가죽부대같은 생활을 찢을 수 있을까. 너무나 쉽게 덤볐던 탓도 있지만, 절박하지 않은 자의 어정쩡한 모습 때문에 이 질긴 가죽부대를 찢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절실하지 않아서, 운이 따라주지 않아서 내 꿈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겠다는 그런 변명은 싫은데...’
딴에는 심각했던지 하루에도 몇십번씩 이런 말들을 주절거렸던 지리한 수험생활 그 끝에서. 꿈을 그리는 사람은 그 꿈을 닮아간다는 말이 맞기는 한 것이었을까. 제일 자신없이 치뤘던 공채시험에서 좋은 결과를 얻었다.
그리고, 그토록 그리던 꿈속을 석달이나 밟고 온 나와 얼마간의 거리를 두어본다.

일주일간의 교육
서먹서먹하던 동기들과의 첫 만남을 시작으로 듣도보도 못한 ‘징집, 소집, 동원’이란 말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뭔 말인지, 교육받는 내내 이 단어들의 뜻풀이에 열을 올렸다. 징집? 강제로 모으다. 소집? 강요하기전에 자발적으로 모이다. 동원? 유사시에는 아줌마, 아가씨도 모으다. 연상작용마저 마비시켜 어처구니없는 결론을 내놓고 떡하니 앉아있었을 만큼 병무행정은 처음에 너무나 낯설고 적응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하루하루 거듭되는 과장님들의 교육과 마지막날의 시험은 저만치 나가 떨어진 나를 잡아주었으며, 교육기간에 배운 것들이 지금에사 ‘아! 이런거였구나’하고 내 머리를 칠 때면 그것들이 고리가 되어 나의 흥미를 불러 일으킨다. 그리고 무엇보다 더 나에게 의지가 된 것은 같은 길을 시작한 열네명의 새내기 병무인들이다.
소심한 내게 그들과 함께 시작함은 큰 힘이 되었고, 지금의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이 아닐 수 없는 그들과 내가 맺은 인연을 튼튼히 만들어 나가고 싶다.

소집과 소집계
일주일간의 교육을 접고 열다섯명의 새내기들은 각자의 일상이 될 곳으로 흩어졌고, ‘감사합니다. 소집과 김정은입니다’라는 나의 긴 이름표가 생겼다. 물론 나의 자리도 생겼다. 하지만 뿌듯함도 잠시, 긴 이름이 낯설어 꼬인 혀가 채 풀리기도 전에 믿고 의지해야 할 분이 먼길(2주간의 교육)을 떠나시는 바람에 내가 서무의 자리를 채워야 했다. 읽고 또 읽어도 알 수 없는 공문들을 부여잡고 식은 땀을 흘리고 있으면, 뭔 업무연락은 그리도 많은지. 게다가 처음으로 맞이한 공익근무요원 교육소집은 ‘윤곽없는’, ‘희뿌연’ 그 무엇으로 매일매일 마음에 돌덩이를 하나씩 쌓는 듯 했다. 게다가 민원인의 문의내용을 이해조차 할 수 없었던 지라 전화벨소리가 두려움을 넘어 공포로 다가왔고, 날마다 새롭고 낯선 업무에 기가 죽었다. 덕분에 애꿎은 선배님들과 팀장님께서 고생하셨다. 그렇지 않아도 넘치는 업무에 새내기 일 가르치시느라, 내가 미루는 민원 전화를 받으시느라 더욱 바쁘셨던 것이다.

정신없이 석달을 보내고 난 지금, 윤곽없고 희뿌연 그 무엇을 나는 ‘감 잡았다’란 섣부른 말로 내뱉어 보기도 한다. 하지만 산을 오르듯이 처음 내딛는 힘겨운 발걸음이 먼저 올랐던 분들 덕분에 한결 수월할 수 있었음에도 나는 은근히 내 짐까지 누군가가 들어줄 것이라 여겼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들이 앞섰던 길을 주목하지 않고 그들과 같은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마음만 있었던 것은 아닌지... 내 짐을 지고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몸으로 얻기 위해서는 내가 그 길을 올라야 하며, 그들과 내게 필요한 것은 서로 어깨를 걸고 나아가는 것 뿐인데 말이다. 그리고 처음 내딛던 그 즐겁고, 가벼운 발걸음도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얼마나 걸릴지 모를 힘들고 긴 산행같은 시간들을 보낸 그 언젠가. 내 잠을 붙들어 맬 어떤 뜨거움의 정체, 그것은 병무청 사람들일 것이다. 내 안에 어떤 모양으로든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그들과 싱싱한 연애를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