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어떤 이상(理想)을 가지고 사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가 품고 사는 생각이나 꿈, 이상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동네 산마루에 인자한 모습의 사람을 닮은 “큰바위 얼굴”이라 불리는 바위를 바라보면서 꿈을 키워온 소년이 나이가 들었을 때 큰바위를 닮은 얼굴이 되어있었다는 나다니엘 호돈이 쓴 “큰바위 얼굴”처럼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이상(理想)을 품고 사는 지가 곧 우리의 인생을 결정짓는다고 할 수 있다.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인 내 나이 예닐곱 살 때의 일이다. 아버지가 하루는 가서 ‘라이터돌’을 사오라는 심부름을 시키셨다. 저녁도 되고 무서운 마음이 들었지만 지엄하신 아버지의 명을 거역할 수 없어 약 3km 거리인 읍내 가게에서 라이터돌 2개를 사가지고 왔다. 그런데 라이터돌을 받으신 아버지께서는 칭찬은 커녕 호통을 치시면서 “이놈아 심부름을 제대로 해야지 왜 같은 값을 주고 하나는 작은 것을 사 왔느냐” 시면서 라이타 돌을 당장 큰 것으로 바꿔 오라는 것이었다.
우리가 흔히 보잘것없이 작은 것을 비교할 때 “라이터 돌 키재기”라고 하듯이, 어린 나이에도 그 크기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고 비슷한 라이터 돌을 큰 것으로 바꾸어 오라는 아버지의 꾸지람은 서운하기 그지 없었다.
더구나 읍내까지 가려면 고개를 하나 넘어야 했는데 그곳은 험하고 깊은 산이라 여우가 자주 나타난다 하여 여우작 고개라 불리는 고개였다.
워낙 으슥해서 늦은 시간에는 어른들도 혼자 못다녔고 한낮에도 인적이 없으면 온 몸이 오싹오싹하고 머리 끝이 쭈삣 쭈삣 서는 고개였다. 아버지의 호통에 10리길을 되 짚어 갔다오며 오금이 저리는 예의 그 무서운 고개에 이르렀을 때였다. 뜻밖에 멀리서 불빛이 희미하게 비춰지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같이 고개를 넘을 생각에 한걸음에 달려가 보니 그 자리에는 아버지께서 우뚝 서 계셨다.
대수롭지 않게 라이터 돌을 건네받아 주머니에 넣으신 아버지와 한마디 말없이 여우작 고개를 넘으면서 가슴속에서 뜨거운 뭔가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 후에도 아버지께서는 어린 아들을 두고 일찍 떠나야 하는 당신의 운명을 예견이라도 하신 듯, 초등학교 4, 5학년 시절에도 참외며, 나무를 지게에 지워주시며 읍내에 가서 팔아오라는 엉뚱한 심부름을 자주 시키시며 이 아들을 강인하고 자신감 있게 키우셨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갑자기 돌아가셨지만 지금까지도 어려운 일이 있거나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때면 나는 언제나 그날 어둠 속에서 불빛을 주셨던 아버님에게 도움을 청하곤 한다.
정말로 라이터돌의 크기가 차이가 있었는 지는 지금도 의문이 가지만 하찮아 보이는 라이터돌의 크기조차 비교하듯이 어떤 일을 할 때면 한번 더 살펴보는 관찰력이나, 잘못된 일은 무섭더라도 즉시 바로 잡을 줄 아는 결단력, 사소한 부주의가 공든 탑을 부술 수 있다는 기초 다짐의 지혜, 사랑보다 앞서 먼저 소중한 사람들에게 들어야 할 채찍의 필요성, 그리고 백마디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랑 등에 관한 말없는 가르침….
나이를 더해가면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나이만큼 커져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며칠전 큰 아들을 출가시키면서 문득 나의 모습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찾아보았다. 아버지에게서 느꼈던 위엄, 소박함, 근면, 성실 등등…
아직은 부족하지만 그런대로 아버지의 모습이 느껴지도록 애써 온 듯도 하다.
몇 년전 교육부에서는 학생들에게 존경할 수 있는 인물을 갖게 하자는 취지에서 우리사회의 “큰바위 얼굴”을 찾는 작업을 했다가 여론조사 결과 큰바위 얼굴로 뽑힐 만한 위인이 없어 포기한 적이 있다고 하는데 아들애의 가슴에는 어떤 큰바위 얼굴이 있을지 궁금했다.
아무리 멋지고 능력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부귀와 영광만 추구하는 사람은 추하기 짝이 없고 겉은 아름다울지 몰라도 아무에게도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또 호의호식하더라도 돈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남에게 상처밖에 줄 것이 없듯이 무엇을 바라며 사는가에 따라 삶이 전혀 달라 질 수 있을 것이다.
이제 희망찬 2003년이 시작되었다. 우리의 마음속에 이상은 무엇인지, 큰바위 얼굴은 어떻게 생겼는지 한번쯤 자세히 살펴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