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는 길을 뛰는 것입니다. 매일 뛰는
길을 뛸 때도 있지만 때로는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호기심으로 새로운 길을 찾습니다. 계절에 따라,
조건에 따라 다른 길이 주는 새로운 느낌을 갖는 것이 달리기의 즐거움 중의 하나입니다. 특히 겨울철
아무도 밟지 않은 길을 뛸 때 세상과 내가 하나됨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 줍니다.
눈이 내린 새벽은 만사를 제쳐두고 뛰러 나갑니다. 밖으로 나가자마자 미지의 세계로 빨려드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때마침 눈이라도 오면 내가 내뿜는 허연 입김과 눈방울이 묘한 대조를 이룹니다.
뛰는 나의 모습을 멀리서 카메라가 잡는 장면을 상상해 봅니다. 별만 떠있는 깜깜함 속에 눈의 희미한
빛만이 내 존재를 알려줍니다. 조금 더 가까이 카메라 앵글을 들이대면 외롭게 뛰고 있는 사람을 점점이
이어지는 발자국만이 따라가는 장면이 보여집니다.
 이런
행복한 상상을 하면서 뛰다 보면 어느 덧 나와 외부세계와의 경계가 없어짐을 느낍니다. 아직도 만물이
형체를 드러내지 못하는 어둠 속으로 뛰어가노라면 만물의 형상이 주는 혼돈에서 벗어나 나의 내부에
더욱 집중할 수 있게 됩니다. 나의 안쪽으로 집중하면 할수록 세상과 나와의 경계는 더욱 얇아집니다.
그리고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 아(我)와 비아(非我)의 구분이 없어지고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상태에 접어듭니다. 이것이 깨달음이고 장시간 지속될 수 있는 것이라면 아마 삶에 대한 번민은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수 만가지 욕심과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저로서는 이런 순간의 경험은 마치 전생의
기억처럼 진짜 겪은 것인지 다만 내 머리 속에서 상상하는 것인지 그저 희미할 뿐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또 다른 길이 있습니다. 집에서 가까운 망우리 공원묘지 사이길 입니다. 어둔
새벽에 뛰면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철학적 명상을 할 수 있는 곳입니다. 망우리 공원묘지 산책로는
무덤군(群) 사이에 아스팔트로 포장된 도로입니다. 저 멀리 산 밑으로는 가로등과 차량의 전조등이
화려하게 빛나고 있지요. 소리는 없습니다. 내가 딛는 발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없습니다. 죽은
자 사이로 뛰고 있는 나, 죽은 것과 비슷한 형태인 잠을 자고 있는 살아있는 사람들, 그리고
살아있는 자들의 불빛. 공원묘지 사잇길로 뛰고 있는 나는 삶과 죽음이 함께 있는 곳을 뛰는 것입니다.
삶과 죽음은 사실 하나의 연장선에 있음을 느낍니다. 내가 나 아닌 것으로 이루어져 있듯이 삶은
죽음이 있기에 존재하는 것임을 생각하게 됩니다. 삶과 죽음을 하나로 인식할 때 집착과 욕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망우리 공원묘지 산책로는 가파른 언덕길이 2킬로미터 이상 이어집니다. 조금만 빨리 뛰어도 다리가
아프고 숨이 차서 힘들지요. 그러나 이런 고통을 느끼며 나를 확인할 수 있어 더욱 즐겁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것을 ‘자기와의 싸움’ 또는 ‘자기를 극복하는 것’이라고 말하더군요. 그러나
나는 나와의 싸움을 하지 않습니다. 세상과 나와의 경계가 무너짐을 느낄 때 싸워야 할 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세상을 사랑하게 되고, 세상과 하나인 나를 사랑하게 됩니다.
몇 일 전 아버지 묘소에 인사 드리기 위해 대전 국립묘지에 갔을 때 이 곳에서 뛴다면 망우리보다
더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이런 길 외에도 모든 길이 달리면 재미있습니다. 산길, 골목길, 강둑, 운동장, 언덕길...
특히 가보지 않은 길을 뛰면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고 사물을 새롭게 보는 눈을 가지게 됩니다.
이제 겨울이 끝나 갑니다. 지금까지 오던 길을 바꾸어 새로운 길로 가보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까?
달리기를 새로 시작하는 것도 ‘새 길’을 가는 것입니다. ‘가고 있는 길’과 ‘가지 않은 길’
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지 않은 길에는 ‘갈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달리기의 길은 여러분이
‘갈 수 있는 길’ 입니다. 가정의 행복과 자신의 건강으로 갈 수 있는 길입니다.
추운 계절이 다 가기 전에 흘러가는 강물을 따라 한 번 뛰고 싶습니다. 유구히 흘러가는 강물의
모습을 배우며 그 기운을 내 몸 속에 담고 싶습니다. 몸에 힘을 빼고 자연스런 흐름을 따라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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