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년 8월 29일, 군악대의 요란한 주악 소리와 함께 부산항을 떠나 베트남으로 향할 때 나는 내 생애 첫 유서를 썼다. ‘기제일의 유서’(其第一의 遺書)라는 제목의 이 유서는 조심스레 자른 손톱과 발톱, 머리카락과 함께 봉투에 담겼고, 이를 통해 베트남 전장에서 맞닥뜨려야 했던 죽음의 공포에서 어느 정도 헤어날 수 있었다. 대한민국 군인으로서 자유민주주의 수호에 한 몸 바치는 데 주저할 것이 없다는 베트남전 지원 당시의 마음가짐도 더욱 굳어졌다.

따가운 이국의 태양 아래서 포탄의 먼지와 함께 사라져간 순수한 민족의 씨알들의 숭고한 정신을 내 스스로 실천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베트남에 도착했던 나는 곧 육군 십자성부대 병기중대에 배속되었다. 이 부대는 베트남의 허리 부분에 해당하는 퀴논항 인근에 위치했는데, 이곳에서도 나는 유서를 몇 차례 더 써야만 했다. 전장 상황이 위급할 때면 수시로 부대에서 쓰게 했기 때문이었다. 나의 캐비닛 속에는 길게 쓴 유서가 늘 남겨져 있었다.
당시 나는 임무 때문에 미군부대에 출입하는 경우가 많았다. 완전무장한 상태에서 군용 트럭을 타고 민간인 마을을 통과할 때면 다른 사람들은 베트콩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무섭도록 속력을 내며 달리고는 했다. 하지만 나는 유서도 이미 몇 차례 작성해 제출했겠다 겁 없는 ‘따이한’ 군인답게 전장을 누비고 다녔다.

이러한 전쟁 상황에서도 짬짬이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비록 철모를 쓰고 소총에 실탄을 장전한 채였기는 했지만 주말마다 군인교회에 다니면서 미국 헬리콥터부대 교회와 연합 예배를 가진 것이었다. 또 퀴논의 한 국군부대 교회인 아리랑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성가대 활동을 했던 기억은 정말 잊을 수 없었다. 느닷없이 개최된 사령부 웅변대회에 엉겁결에 참가해 1등상을 받기도 했고, 체육대회의 축구시합에서 1분도 안 남기고 얻은 코너킥을 바로 골인시킨 것도 기억에 남는 ‘사건’ 중 하나다.

반면 부패한 베트남 티우 독재정권과 가난과 전쟁에 찌든 베트남 양민들을 보면서 가슴 아파하고 분노했던 기억도 새삼 떠오른다. 전쟁이 얼마나 인간을 황폐하게 만드는 지를 직접 깨달았던 것도 이때였다. 이런 까닭에 이듬해 퀴논항을 떠나 고국으로 돌아오면서도 씁쓸한 마음을 금할 길 없었다.

작열하는 태양이 어찌나 따가운지 몸 가누기도 힘들 지경이었던 그곳 생각이 날 때마다 생사를 같이했던 전우들의 모습이 제일 먼저 나의 눈 앞에 클로즈업된다. 이런 현상은 어쩌면 베트남전을 몸소 겪었던 사람이라면 공통으로 느끼는 일인 지도 모른다. 함께 고생하고 갖은 어려움을 같이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형편으로 지냈던 전우를 잃어 본 참전 병사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국방의 힘은 병사 개개인의 힘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시간에도 국토방위에 여념이 없는 70만 장병들도 30여 년 전 내가 겪었던 경험을 그대로 겪고 있다고 생각한다. 비록 전쟁 중에 병영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국군 장병 모두는 각자의 가슴 속에 이름을 달리하는 유서를 지니고 있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