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유치원 때부터 소아천식으로 병원을 드나들었다. 직장에 다니는 부모님을 대신해 우리 할아버지는 항상 내 곁에 계셨다. 시간이 지나도 낫지 않고 툭하면 병원에 입원하는 나를 보며 할아버지는 한숨을 쉬시며 “하나밖에 없는 손자가 왜 이렇게 아파 싼다냐?” 하시며 안타까워하셨다 학교에 다니면서도 이 병은 날 너무 힘들게 했다. 밤엔 기침 때문에 잠을 못 잤고 수업시간에도 콜록거리는 나를 보며 친구들은 ‘입 좀 막고 해’ 하며 내 옆에서 멀리 떨어졌다. 그런 친구들을 보며 난 나오려는 눈물을 꾹 참고 학교가 끝나면 날 기다리고 있는 할아버지 품에 안겨 울곤 했다.
그래서 난 방학을 간절히 기다렸다. 4학년 마지막 겨울 방학식 우리 선생님은 자신의 어릴 때 이야기부터 시작해 군대 다녀온 이야기까지 여러 이야기를 해주셨다. 너무 재밌고 신기해 우리 반 아이들은 웃음을 참지 못 했다. 그리고 선생님은 “남자라면 꼭 군대는 가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선생님의 말씀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 아이가 “야 이세찬 넌 좋겠다. 군대 안 가도 되잖아 병 걸렸으니까”라며 큰 소리로 말했고 친구들은 어디서 들었는지 넌 군대 면제라며 떠들어댔다. 친구들이 미웠다. 그리고 방학이 시작된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아버지께 정말로 천식이 있으면 군대를 못 가냐고 물어볼 때마다 우리 할아버지는 그런 소리를 왜 하냐며 화를 낼 때도 있었다. 그러면 나는 또 울곤 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할아버지의 생신으로 우리 집은 오랜만에 시끌벅적했다. 그런데 음식 냄새로 진동한 거실 사이로 아빠께서 할아버지 방에 있던 오래된 TV를 옮기고 있었다. 그리고는 검은색 비디오테이프를 꺼내 TV 밑으로 쏙 밀어 넣었다 지금은 볼 수 없는 비디오가 달린 오래된 TV가 켜지며 ‘우정의 무대’라는 자막과 함께 많은 병사 아저씨들이 박수를 치고 있었다. 뽀빠이 이상용 아저씨는 “여기는 경남 공군교육사령부”라고 외쳤다 ‘에이 저게 뭐야?’ 난 투덜거리며 식구들을 쳐다봤지만 이상하게도 할아버지의 얼굴에도 아빠의 얼굴에도 미소가 넘쳐나며 TV에 푹 빠져 있었다. 그리고 들려오는 음악 소리. ‘엄마가~ 보고플 때~ 엄마 사진 꺼내놓고~ 엄마 얼굴 보고 나면~’
카메라가 비치는 군인 아저씨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리운 어머니’라는 코너였다.
“지금부터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자신의 어머니라고 생각하는 장병들은 무대로 올라 오십시오.”라는 사회자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많은 군인 아저씨들이 무대로 올라갔다. 그리고 O, X퀴즈를 거치며 최종 7명의 병사들이 남게 되었다. 그런데 난 인터뷰를 하고 있는 한 군인에게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우리 아빠 이름과 함께 얼굴도 아빠랑 닮은 듯한 한 군인이 “우리 엄마가 확실합니다.” 하고 외치고 있었다.
우리 집식구들은 모두 웃고 있었다. 식구들을 웃게 만든 화면 속의 저 군인은 바로 진짜 우리 아빠였다. 아빠는 모든 테스트를 통과하며 최종 2인까지 남았다 “우리 엄마가 확실합니다.”라고 외치며 말이다 결국 우리 아빠의 엄마 즉, 우리 할머니는 아니었지만 아빠는 행운의 7박 8일의 휴가를 얻을 수 있었다. 이게 바로 아빠의 이등병 시절 1992년 3월 1일 삼일절 특집 방송에 나온 우정의 무대 내용이었다.
지금의 우리 아빠와는 너무 다른 빼빼 말라 얼굴은 하얗고 병자같이 생긴 우리 아빠가 TV에 나오다니 괜히 내가 가슴이 떨려 왔다. 이런 나를 보며 할아버지는 “세찬아 느그 아빠는 니보다 더 약골이었어. 그래도 군대 갔다 왔어 TV에도 나왔잖아 니도 군대 갈 수 있어” 할아버지는 용기를 주고 싶었던 것이다. 곧바로 아빠는 민가에 떨어지는 비행기를 자신의 목숨을 바쳐 다른 곳으로 추락해 전사한 ‘이상희 대위’ 이야기도 해주셨다.
할아버지 손에 자라 아빠와는 어색함이 있었는데 군대 이야기를 하며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지금 나는 아빠와 같은 공군이 되고 싶다. 이상희 대위처럼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군인이 될 자신은 없지만 천식을 이겨내 꼭 대한민국의 공군이 되고 싶다. 그리고 할아버지께 내 모습을 꼭 보여드리고 싶다. 그리고 검은색 비디오테이프는 내 서랍장 제일 위에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난 방학을 간절히 기다렸다. 4학년 마지막 겨울 방학식 우리 선생님은 자신의 어릴 때 이야기부터 시작해 군대 다녀온 이야기까지 여러 이야기를 해주셨다. 너무 재밌고 신기해 우리 반 아이들은 웃음을 참지 못 했다. 그리고 선생님은 “남자라면 꼭 군대는 가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선생님의 말씀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 아이가 “야 이세찬 넌 좋겠다. 군대 안 가도 되잖아 병 걸렸으니까”라며 큰 소리로 말했고 친구들은 어디서 들었는지 넌 군대 면제라며 떠들어댔다. 친구들이 미웠다. 그리고 방학이 시작된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아버지께 정말로 천식이 있으면 군대를 못 가냐고 물어볼 때마다 우리 할아버지는 그런 소리를 왜 하냐며 화를 낼 때도 있었다. 그러면 나는 또 울곤 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할아버지의 생신으로 우리 집은 오랜만에 시끌벅적했다. 그런데 음식 냄새로 진동한 거실 사이로 아빠께서 할아버지 방에 있던 오래된 TV를 옮기고 있었다. 그리고는 검은색 비디오테이프를 꺼내 TV 밑으로 쏙 밀어 넣었다 지금은 볼 수 없는 비디오가 달린 오래된 TV가 켜지며 ‘우정의 무대’라는 자막과 함께 많은 병사 아저씨들이 박수를 치고 있었다. 뽀빠이 이상용 아저씨는 “여기는 경남 공군교육사령부”라고 외쳤다 ‘에이 저게 뭐야?’ 난 투덜거리며 식구들을 쳐다봤지만 이상하게도 할아버지의 얼굴에도 아빠의 얼굴에도 미소가 넘쳐나며 TV에 푹 빠져 있었다. 그리고 들려오는 음악 소리. ‘엄마가~ 보고플 때~ 엄마 사진 꺼내놓고~ 엄마 얼굴 보고 나면~’
카메라가 비치는 군인 아저씨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리운 어머니’라는 코너였다.
“지금부터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자신의 어머니라고 생각하는 장병들은 무대로 올라 오십시오.”라는 사회자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많은 군인 아저씨들이 무대로 올라갔다. 그리고 O, X퀴즈를 거치며 최종 7명의 병사들이 남게 되었다. 그런데 난 인터뷰를 하고 있는 한 군인에게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우리 아빠 이름과 함께 얼굴도 아빠랑 닮은 듯한 한 군인이 “우리 엄마가 확실합니다.” 하고 외치고 있었다.
우리 집식구들은 모두 웃고 있었다. 식구들을 웃게 만든 화면 속의 저 군인은 바로 진짜 우리 아빠였다. 아빠는 모든 테스트를 통과하며 최종 2인까지 남았다 “우리 엄마가 확실합니다.”라고 외치며 말이다 결국 우리 아빠의 엄마 즉, 우리 할머니는 아니었지만 아빠는 행운의 7박 8일의 휴가를 얻을 수 있었다. 이게 바로 아빠의 이등병 시절 1992년 3월 1일 삼일절 특집 방송에 나온 우정의 무대 내용이었다.
지금의 우리 아빠와는 너무 다른 빼빼 말라 얼굴은 하얗고 병자같이 생긴 우리 아빠가 TV에 나오다니 괜히 내가 가슴이 떨려 왔다. 이런 나를 보며 할아버지는 “세찬아 느그 아빠는 니보다 더 약골이었어. 그래도 군대 갔다 왔어 TV에도 나왔잖아 니도 군대 갈 수 있어” 할아버지는 용기를 주고 싶었던 것이다. 곧바로 아빠는 민가에 떨어지는 비행기를 자신의 목숨을 바쳐 다른 곳으로 추락해 전사한 ‘이상희 대위’ 이야기도 해주셨다.
할아버지 손에 자라 아빠와는 어색함이 있었는데 군대 이야기를 하며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지금 나는 아빠와 같은 공군이 되고 싶다. 이상희 대위처럼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군인이 될 자신은 없지만 천식을 이겨내 꼭 대한민국의 공군이 되고 싶다. 그리고 할아버지께 내 모습을 꼭 보여드리고 싶다. 그리고 검은색 비디오테이프는 내 서랍장 제일 위에 간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