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께서 병무청에서 주관하는 글짓기를 말씀하셨을 때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르는 영화 한 편이 생각났다. ‘연평도 해전’이란 영화다. 영화 속에 나오는 참수리 357호가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 영화를 보기 전 다른 전시회를 보려고 사촌 누나와 용산전쟁기념관을 찾은 일이 있었다. 전시회를 보고 나오는 길에 야외에 전시되어있는 탱크와 비행기들을 보았다. 6.25전쟁 때 사용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전쟁 때 사용된 것들이라고 해서 유심히 보기도 하고 타보기도 하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관람했는데 전쟁기념관 앞쪽에 총탄 자국이 많은 배 한척을 보게 되었다. 앞쪽에 설명을 보니 2차연평해전 ‘참수리 고속정 357호’라고 적혀있었다. 궁금한 마음에 배 안으로 들어가 영상 한 편을 보았다. 충격이었다. 연평해전은 내가 태어나기 2년 전인 2002년 6월 월드컵 축구 대회가 우리나라에서 개최되던 해에 그것도 우리나라가 4강의 신화를 이루었던 6월 29일 터키와 3, 4위전을 하던 시간에 일어났다고 하니, 전쟁은 먼 옛날이나 아니면 다른 나라에서나 일어나는 것이라 생각했던 나에겐 충격이었다.
분단국가에서 살고 있는 것이 새삼 느껴졌다.
이 해전으로 우리나라는 6명의 젊은 군인들을 잃었다고 한다. 나는 엄마께 여쭈어 보았다. 이 사건이 일어났을 때 온 나라가 전쟁의 공포 속에 있지 않았는지를, 그런데 엄마의 대답은 좀 뜻밖이었다.
“음……. 사실 엄마도 연평해전이 이렇게 심각한지 몰랐단다. 아마 그때가 터키와 3, 4위전 경기가 있었을 거야.
그래서 나라가 온통 축제 분위기였단다. 그 축제 분위기 속에 이 해전이 묻혀버렸나 보구나, 엄마도 반성이 되네.”
엄마 말씀에 갑자기 목숨을 잃은 6명의 젊은 용사들과 부상을 입은 19명의 용감한 해군들이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얼마 후, 연평해전이란 영화를 부모님과 함께 보게 되었는데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이 먹먹하였다.
분단국가인 대한민국의 슬픔을 느끼게 하는 영화였다.
6명의 용감한 해군 아저씨들의 이야기들이 더욱 나를 놀라게 하였다. 마지막까지 자신보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그들이 있어 내가 지금 이렇게 친구들과 함께 공부도 하고 축구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참수리 357호 정장 윤영하 소령, 그의 지위 하에 조타장 한상국 중사, 조천형 중사, 황도현 중사, 서후원 중사,
박동혁 병장의 이야기는 나와 우리 가족을 숙연하게 하였다.
북한의 표적이 되어 공격을 받는 중에서도 배의 조종을 맡은 조타장 한상국 중사는 죽음을 앞에 두고서도 조타장 키를 놓지 않고 자신의 손을 묶어가며 배를 지켜내었으며, 포탄이 머리를 관통했는데도 방아쇠를 쥔 채 전사한 황도현 중사가 있었고,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박동혁 병장의 84일간의 투병 이야기에 엄마와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갑판에서 동료들을 구하다 다쳤는데도 계속 동료들을 구한 의무병 박동혁 병장, 그의 몸에서는 100여 개가 넘는 파편이 나왔으며 그 무게가 3kg이 된다고 했다. 그가 겪은 고통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최악의 고통이었다고 한다.
‘이들이 이렇게 나라를 위해 희생을 할 시간에 우리는 무엇을 했을까?’
‘그들의 희생으로 나라가 지켜지고 평화를 선물 받은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용산 전쟁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던 참수리호의 포탄 자국들이 생각났다. 여기저기 빨갛게 표시된 포탄 자국들, 그리고 포탄으로 인해 깨어진 ‘벌킨’이라는 곳, 그들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싸웠을 그곳.
나는 시대를 초월하고 국가를 초월해서도 찾아보기 힘든 책임감 강하고 희생정신이 투철한 그들을 잊지 않을 것이다. 또한, 그 해전으로 인해 부상당한 다른 용사들의 정신도 가슴 깊이 새길 것이다. 시간이 지나 언젠가 내가 나라를 지키는 군인이 되는 날, 의무가 아니라 그들처럼 책임감과 자부심으로 나라를 그리고 내 가족을 지키는 대한민국의 아들이 되어야겠다.
마지막으로 대한민국의 모든 국군 아저씨들에게 감사드린다. 충성!